2002. 02. 『조선 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귀신(鬼神)

- 자연철학에서 추구한 종교성 -


김   현


1. 귀신의 의미

2. 중국 유학에서의 귀신 개념

3. 조선 유학에서의 귀신 개념

4. 유교적 귀신 개념의 의의



1. 귀신의 의미


  귀신(鬼神)이란 제사의 대상이 되는 영격(靈格)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민간 신앙에서는 사람의 행위의 선악에 응하여 화복을 내리며, 제사하는 자손을 보호하고, 제사를 받지 못하면 재앙을 끼치기도 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유학,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자연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해 주는 개념으로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귀신 개념이 우리의 전통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이유는 그것이 유교(儒敎)의 종교성(宗敎性)과 의례성(儀禮性)에 관한 철학적 해석의 근간을 형성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로부터 현대 한국 사회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는 제사(祭祀)라고 의식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 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험(靈驗)한 힘을 지닌 존재가 있어서 그가 우리 인간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하는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른바 천신(天神)․지시(地示)․인귀(人鬼)라고 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은 유형의 사물이 아니되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인 관념도 아닌 ‘보이지 않는 실재(實在)’다. 전통시대의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왔다. 유학 사상이 귀신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논하였던 이유는 그것이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 미신적(迷信的)인 기대나 두려움을 낳기보다는 합리적으로 설명됨으로써 그에 대한 의식이 인간들의 삶 속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착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유교를 국가적 지도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유교적 제의(祭儀)를 준행하는 데 온 사회의 힘을 모았던 조선시대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귀신에 대한 바른 이해는 가장 중요한 학문 주제의 하나였다.

  유학 사상이 발전해 온 역사가 짧지 않은 것처럼, 중국 고대부터 유학의 일부가 되어 온 귀신 개념도 끊임없이 함의(含意)를 넓혀 갔다. 귀신 개념은 유학의 발전과 더불어 어떠한 변화 과정을 거쳤으며, 조선의 유학에서는 어떠한 개념으로 정착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중국 유학에서의 귀신 개념


  1) 고대 문헌에서의 귀신 개념


  공자(孔子)는 그의 제자로부터 귀신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1) 그가 귀신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지 않았던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허황한 것을 좇기보다는 현실의 문제에 충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공자가 보인 그와 같은 자세로 인해 선진 유학(先秦儒學)은 사후(死後)의 세계나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해 관심을 모으지 않고 오로지 현세의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 가는 데에 주력하는 현세적 철학 사상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른바 귀신이라고 불리우는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논의들은 모두 유학의 근본 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로 보아야 할까?  『예기(禮記)』, 『주례(周禮)』, 『주역(周易)』 등과 같이 유교 경전으로 취급되는 고대의 문헌에 나오는 귀신에 대한 논의들은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근본 입장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공자가 귀신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 것이 사실이고, 또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자가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공자의 사상에서는 인(仁)이라고 하는 윤리 덕목과 함께 예(禮)라고 하는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 중요시되었는데, 그 예의 큰 부분을 이루는 것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즉 인간의 죽음을 주제로 하는 예제(禮制)라는 점도 유학이 사상이 귀신이라는 존재와 무관할 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이 점에서 본다면 공자가 귀신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응으로 여겼던 자세는 ‘귀신에 대해 일부러 알려고 하지는 않되, 예제를 준행하는 차원에서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예기』 「中庸」편에는 제사를 흠향(歆饗)하는 귀신에 대해 “귀신의 덕(德)은 성대하도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되, 만물의 주체가 되어 빠뜨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옷차림을 깨끗이 하여 제사를 받들고 신이 위에 계신 것처럼, 옆에 계신 것처럼 여기게 한다.”2)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 감각할 수는 없으나 실재하는 존재, 만물의 주체가 되고 제사 때마다 우리 곁에 강림하는 존재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글이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마음으로 우리 곁에 있음을 느끼며 공경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극한 정성으로 그에 대한 제사를 받들 수가 있다. 『中庸』의 이 글은,  유교의 제례가 관념적이거나 형식적인 행사에 그치지 않고 인간들이 스스로를 경건하게 정화하는 윤리적․종교적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귀신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사고에 있음을 알게 한다.

  한대(漢代)에 와서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예기』 「제의(祭儀)」 편이나 『주역』 「계사(繫辭)」에는 귀신을 인간이 죽은 후에 그 혼백(魂帛)이 무형(無形)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한 글들이 보인다.  「계사」에서는 “정기(精氣)가 어리어 사물이 되고 혼(魂)이 유산(游散)하여 변화하니, 이로써 귀신의 정상(情狀)을 알 수 있다(精氣爲物, 游魂爲變, 是故知鬼神之情狀.)”3)고 하였다. 이 때 정기가 어리어 사물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형에서 유형으로의 변화, 즉 사물의 형성과정을 말하는 것이며, 혼이 유산하여 변화한다는 것은 유형에서 무형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기』 「제의」 편의 기록은 공자와 그의 제자 재아(宰俄)에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귀(鬼)라고 한다. 골육은 땅속에서 썩어 흙으로 변하지만 그 기는 위로 솟아올라 빛을 내기도 하고 연기처럼 피어오르기도 하며 처연한 기운을 내기도 한다.(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 焄蒿․悽愴.)”4) 고 하였다.

  「계사」와 「제의」의 귀신론이 과연 공자가 가졌던 귀신에 대한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논어』에서 보듯이 귀신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일부러 피하였던 공자가 입장을 바꾸어 귀신의 실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공자를 가탁한 후세의 논설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학 본연의 뜻과 상치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원초적인 생명 에너지로 간주되는 기(氣)의 취산(聚散)을 가지고 인간과 사물의 생멸(生滅)을 논하는 것은 중국의 고대에서부터 있어 온 사고이며,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교적 제의를 강화시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제사의 대상이 되는 귀신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 제의(祭儀)를 논함에 있어 기론적(氣論的)인 사생관(死生觀)이 도입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면에서 기론적인 사생관은 중용에서 이미 언급된 귀신의 실재성을 더욱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유교적 제의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송대 유학의 귀신 개념


  공자․자사의 시대에 제사의 대상이 되는 영격(靈格)으로서 유학 사상에  편입되었고, 한대(漢代)에 들어서는 기론적인 생멸관과 결합하여 유산(游散)하는 혼백의 뜻을 갖게 된 귀신 개념은 성리학의 시대인 송대(宋代)에 이르러 자연철학적 개념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게 되었다.

  중국의 송대, 그 중에서도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장재(張載, 1020-1077),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등의 활동하였던 북송(北宋) 시대는 유학의 새로운 사조로서 자연 만물의 존재 근거를 탐구하는 존재론적인 자연철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유학의 많은 개념어들이 자연철학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귀신 개념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북송 시대의 대표적인 우주론자로 일컬어지는 장재는 태허(太虛)라고 이름한 기(氣)의 원초적 상태를 우주의 최초의 모습으로 상정하고 천지만물은 모두 그 기의 취산 운동 가운데 빚어진 것으로 설명하였으며, 귀신이라고 하는 것은 취산 운동을 일으키는 음․양 이기(二氣)의 내재적인 변화 능력이라고 보았다.[鬼神者,二氣之良能也.]5) 귀신을 제의론적(祭儀論的)인 개념에 국한시키지 않고 우주 자연의 보편적인 운행 현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장재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로서,  우주의 근원적 실체를 이(理)와 기(氣) 두 가지로 상정하여 이기이원적(理氣二元的)인 세계관을 정립한 정이는 귀신을 “조화의 자취(鬼神, 造化之迹.)”6)라고 정의하였다. 즉 어떤 실체가 만들어낸 현상을 가리켜 귀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조화의 주체는 물론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 우주 자연일 것이다. 정이는 “형체로 말하면 천(天)이요, 주재로 말하면 제(帝)요, 공용으로 말하면 귀신(鬼神)이요, 묘용으로 말하면 신(神)이요, 성정으로 말하면 건(乾)이다.(以形體謂之天, 以主宰謂之帝, 以功用謂之鬼神, 以妙用謂之神, 以性情謂之乾.)”7)라고 하였다.  천․제․귀신․신 등은 모두  이와 기로 이루어진 우주 자연을 각각 어느 한 측면에서 바라본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공용이라는 말로 설명된 귀신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상 속에서는 드러나는 자연의 변화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묘용으로서의 신은 것은 자연 전체의 변화 운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북송 시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자연철학적 용어로 변모하게 된 귀신 개념은 신유학의 집대성자 주희(朱熹, 晦庵 1130-1200)에 계승․발전되었다.  주희와 그의 제자들의 학문적 문답을 모은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귀신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엮어졌으며,  귀신의 이야기는 모두 이 곳에 모여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한 문답이 전개되었다.  이곳에 나타난 주희의 귀신론의 큰 틀은 북송 유학의 자연철학적 귀신론과 선진․한당 유학의 제의론적인 귀신론을 하나로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희는 귀신의 자의(字意)에 대해, “신(神)은 펼치는 것이고 귀(鬼)는 움츠리는 것이다. 예컨대 바람․비․천둥․번개 등이 막 발생할 때는 신이고 바람이 그치고 비가 지나가며 천둥이 멈추고 번개가 쉬는 것은 귀이다.(神, 伸也; 鬼, 屈也. 如風雨雷電初發時, 神也; 及至風止雨過雷住電息, 則鬼也.)”8) 라고 하였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어느 것이나 예외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한 생멸의 과정은 무(無)에서 유(有), 유에서 무로의 변화인데, 그 유․무의 사이를 오고가는 것,  다시 말해 본체로부터 현상, 현상으로부터 본체로 변화해 가는 것 하나 하나를 다 귀신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철학적 개념으로 설명된 귀신의 의미는 장재․정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주희의 귀신 개념은 이것에만 머물지 않고 제사의 의의를 뒷받침해 주는 이론을 함께 수용한다.  주희는,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물이나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그 기가 흩어지지만,  단시간에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완전한 소멸에 이르기 전까지는 제사를 통해 느껴서 다가오는 이치가 있다고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기가 다 흩어진 후라 할지라도 조상과 자손이 한 핏줄이면 그 기가 동일하기 때문에 통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9) 귀신을 기의 취산이라는 자연현상으로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조상의 넋을 오래도록 숭모하는 제사의 의미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주희는 신유학의 집대성자답게 귀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대 유학의 제의설에 등장했던 귀신 개념과 북송 성리학의 자연철학적 귀신관을 함께 수용하여 합리적 이론이면서 동시에 제사라고 하는 종교적 제의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포괄적인 귀신론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주희의 그 같은 집대성적 귀신 개념에 포용된 두 가지 요소, 즉 제의론적(祭儀論的) 요소와 자연철학적(自然哲學的) 요소는 완전하게 융합된 것이 아니라, 목적하는 바에 따라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다른 쪽의 의미가 약화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주자 성리학의 귀신 개념이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이유는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3. 조선 유학에서의 귀신 개념


  1) 조선 시대의 제례와 귀신


  장재․정이․주희와 같은 중국 송대의 성리학자들이 정리한 성리학적인 귀신 개념, 즉 본체와 현상을 매개하는 중간적 존재로서의 귀신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학문을 계승한 조선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이해되어 조선 성리학 이론의 중요한 부분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귀신에 대한 갖가지 논의들이 자연철학적 원리 탐구 위주로만 전개된 것이 아니며, 종교적 의례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더 큰 의의를 두었다고 하는 것이다. 성리학의 철학적 귀신 개념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이전부터 초현실적인 존재로서의 귀신은 우리 선조들의 삶의 여러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그러한 귀신들을 대상으로 갖가지 제례가 조정과 민간에서 더욱 강화되게 되었다. 그러한 각종 제례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 그 시대의 사상적, 정치적 지도 계층이었던 유교 지식인들있기 때문에 제의론적인 귀신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더욱 각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쌓은 권근(權近, 1352~1409)이 건국 초기에 태종에게 올린 상주문 안에는 그 시대의 성리학자들의 귀신이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로 실체시(實體視)했는지를 알게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태종이 즉위한 직후 왕이 기거하는 궁실(宮室)이 화재를 입게 되자 이를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왕의 교지(敎旨)에 따라 국왕이 근신하고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항목으로 “저승에서 원통함과 분함을 품고 한에 맺혀 흩어지지 않고 굶주리어 먹을 것을 구하는 귀신들”에 대해 정례적으로 국가적 차원의 제사를 올릴 것을 제안하였다.10) 이러한 사실은 성리학자들도 그 시대의 일반인들이 받아들였던 초현실적 존재로서의 귀신이 실재함을 인정했으며,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두려워할 대상으로 여겼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초인적 존재가 실재함을 믿고, 그것에게 지극한 정성의 제사(祭祀)를 올린 사실은 조선시대의 시대의 역사 기록을 통해 무수히 확인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法制)로서 기록되어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중단 없이 시행되었던 국가적인 제사는 그 규모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3 가지로 나뉘어 행해졌는데,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3개월 전부터 준비되는 종묘(宗廟)․사직(社稷)의 대사(大祀)만 하더라도 일년에 10 차례나 행해졌고, 서울과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왕의 이름으로 행해진 공식적인 제사를 모두 헤아리면 100여 회를 훨씬 상회한다. 정기적인 제사 이외에도 한해가 들거나 돌림병이 돌거나 할 때 왕의 명령으로 특별히 지내는 제사까지 합하면 제사는 곧 조정의 일과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권근의 경우와 같이 관료의 지위에 있던 유교 지식인들은 국가적인 제례가 있을 때마다 제문(祭文)을 쓰는 등, 의식을 진행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관직에 있고 없고를 떠나 사대부 집안의 사람이면 누구나 문중 식구들의 지극한 정성을 모아 선대(先代)에 대한 제사를 수시로 올렸고,11)  학문을 하는 학인들은 전국 각처의 향교(鄕校), 서원(書院), 사우(祠宇)에 모여 선배 학자들에게 봄․가을로 시제를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약식의 제사를 드렸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광범위하게 시행된 제사는  현상에서 감각되지 않는 초현실적 존재, 즉 귀신(鬼神)이라고 하는 것을 대상으로는 하는 의례이다. 그 초현실적 존재를 실체로서 인정하는 사고를 갖지 않고는 몸과 마음의 정성을 다하는 제사의 예(禮)를 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귀신을 관념적인 존재, 또는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다룬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영험한 힘을 지닌 초현실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경건히 의례를 올리는 자세를 함께 견지해 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 귀신의 문제와 관련하여 주어진 철학적 과제는 귀신을 실체를 바르게 밝혀서 그것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가 미신적인 데로 흐르지 않고 유학의 합리성․윤리성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귀신에 대한 자연철학적 이해


  귀신의 실존(實存)을 인정하되 두렵기만한 난신괴력(亂神怪力)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귀신에 대해 철학적인 논의를 시작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기론(理氣論)이라고 하는 존재론적 이론 틀에 입각하여 귀신의 문제를 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중국 송대 성리학의 귀신론은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합리적인 귀신 이해의 길을 열어 주었다. 조선 성리학이 그 이론 정립의 정점을 향해 발전해 가는 과정에 있었던 조선 초기의 학자로서 귀신 문제에 대해 체계적인 저술을 남긴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귀신(鬼神)의 어의(語義)에 대해, “귀(鬼)란 것은 돌아간다[歸]는 뜻이요, 신(神)이란 것은 펼쳐진다[伸]는 뜻이다. 그렇다면 천지 사이에 와서 펼쳐지는 것은 모두 신이요, 돌아가는 것은 모두 귀라고 할 수 있다.”12)고 하였다. 귀신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실체가 아니라, 자연 속의 여러 사물과 현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그 중간 과정으로서,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 자연을 그 변화 운행의 측면에서 파악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기(氣)요 그 은미하게 내재해 있는 것은 이(理)니 이를 총괄하여 귀신이라 한다.”13)고 하였다. 귀신이라는 것은 이나 기와 같이 근원적 존재의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기가 함께 묶여져서 자연 속에 실재하며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는 주재력(主宰力)을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14)


3) 성리학적 사생관과 귀신


  성리학의 자연철학적 입장에서 해석된 귀신은 이와 기의 합으로서 본체와 현상, 유와 무의 사이를 오고가는 존재이다.  그와 같은 귀신의 개념을 인간의 일에 적용하면, 그것은 원초적인 무에서 탄생으로 이르는 과정, 그리고 죽음에서부터 원초적인 무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를 가리키게 된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몸도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탄생은 어머니의 태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기, 그리고 그 시점에 주위를 떠돌던 기가 합쳐져서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를 형성함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죽음은 그 과정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다.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던 한 인간의 생명이 다하게 되면 그 몸을 이루고 있던 기가 자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 기가 흩어짐은 사람이 죽는 순간 곧바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온갖 정성을 모아 부단히 시행해 왔던 갖가지 제사가 허구나 관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바로 이것을 근거로 설명된다.  제사의 대상이 되는 죽은 사람의 귀신, 즉 인귀(人鬼)라고 하는 것은 비록 소멸의 과정에 있는 유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소멸에 이르기 전까지는 실재하는 존재로서 제사를 흠향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은 이 점을 불 꺼진 화로 속에 더운 기운이 한 동안 남아 있다가 시간이 더 지나야 차갑게 식는 것, 그리고 여름날에 해가 넘어간 뒤에도 더위가 남아 야음(夜陰)이 짙어진 뒤에야 서늘해지는 것에 비유하였다. 사람의 기(氣)도 그가 죽은 후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15) 이황은 그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이 ‘죽은 자를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라’고 하였으니, 제사의 의의는 바로 그런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16)

  이렇듯 인간이 죽은 후에 곧바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혼백(魂魄)이 귀신이라는 존재로 남아 후손과 교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원성에 대한 염원을 담은 종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이의 혼백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으로 존재할 뿐,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기는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흩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이 귀신이니, 귀신의 존재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귀신을 이렇듯 한시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선대에 대한 제사를 4대로 그치게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그 이상의 조상은 관계가 소원하여 애틋한 추모의 정이 없을 뿐 아니라, 혼백을 지탱하는 기가 완전히 소멸되어 더 이상 제사를 흠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성리학의 사생관(死生觀)은 기독교․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의 내세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으며, 영원성(永遠性)을 추구하는 종교적 면모가 극히 미약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영원한 존재와 관계 맺고자 하는 열망, 또는 스스로 불멸(不滅)의 존재로 남고자 하는 소망을 그처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유교의 사생관이 영원성에 대한 바램을 포기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 준 사람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기의 작용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전제를 세운 뒤에, 그 삶과 죽음 사이에는 형상를 이루는 기의 모이고 흩어짐[聚散]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기의 순수한 본질은 있고 없음[有無]의 구분을 넘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기 중에서도 흩어지는 것과 흩어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여 전자는 형백(形魄)이라고 하였고 후자는 담일청허(湛一淸虛)라고 하였다. 기에 취산(聚散)이 있는 것은 형백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 때문이요, 기에 유무(有無)가 없는 것은 담일청허가 영원히 한결같기 때문이다. 서경덕은 인간의 정신이나 지각은 바로 이 담일청허한 기의 본질에 관계하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사람의 정신이나 지각은 물질적인 형기(形氣)에 의착하고 있으니 그 형기가 흩어지면 그것의 현상적인 모습은 사라질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에 간직된 담일청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을 바라보면 인간의 지각이나 정신도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17)

  이른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이라고 일컬어지는 서경덕의 이 이론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끌어간 이기이원론자(理氣二元論者)들에 의해서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원론자(二元論者)들이 서경덕이 주장에 대해 반대한 것은 기를 가지고 존재의 항존성(恒存性)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지, 서경덕이 희구한 존재의 영원성 자체가 비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비평가 이황(李滉)도 서경덕의 이론에 대해서 이(理)를 기(氣)로 오인했다고 했을 뿐,18) 인간이 삶과 죽음의 구분을 넘어서 어떤 영원한 존재와 합일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경덕이 기의 담일청허로 지목했던 순수하고 영원한 본질은 이(理)라는 이름으로 실체화 되어 그 순수성과 영원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인간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그 혼백의 기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불멸의 이(理)가 그 존재의 영원성을 담보한다는 생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의 한 사람인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에 의해서도 천명되어졌다. 그는, 오래 전에 죽은 조상은 후손들과 더불어 서로 감통할 수 있는 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불멸의 이(理)가 감통(感通)의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 조상에 대한 제사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제사와 마찬가지로 사자(死者)와의 감응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것에 대한 비유로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모여 비를 내리는 것을 들었다. 운기(雲氣)가 없었어도 비가 내릴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19)

  이이의 이러한 설명은 이․기(理氣)의 역할을 구분하여 작위(作爲)의 능력을 기에만 부여하고 이에는 원리적인 성격만을 갖도록 한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의 전제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무리한 이론이라고도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언급에서 의미있게 파악해야 할 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이(理)라고 하는 실체는 단순히 무정의․무조작(無情意無造作)의 자연적, 윤리적 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영원성을 담보해 주는 영명(靈明)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4) 성리학적 귀신 개념에 대한 반성


  조선 유학의 귀신 개념은 서경덕․이황․이이의 시대에 성리학의 이기론에 입각하여 자연철학적 입장과 제의론적 입장을 함께 아우르는 이론으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였고, 그 이론은 후배 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변화없이 수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일부 유학자들 사이에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이질적인 학문에 의해 전통적인 유학의 귀신 개념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이질적인 학문이란 바로 ‘신(神)’이라고 하는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를 중심으로 삼는 기독교(基督敎, 西學)였다.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이 기독교 사상에 접하게 된 것은 17세기 초 중국을 다녀온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李瑪竇) 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후부터인데, 그에 대해 단순히 흥미를 갖는 단계를 넘어서서 본격적으로 학문적인 성찰을 가한 인물들은 이른바 성호 학파(星湖學派)라고 불리우는 이익(李瀷, 1681~1763)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기독교의 교설 중에서도 불멸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영혼 개념은 성호 학파의 학자들에게 유교의 유한한 존재로서의 귀신 개념을 재론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보여진다. 이익의 제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그의 스승에게 성리학적 귀신 개념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때 안정복이 제기한 문제는, 첫째, “제사의 제도는 제사를 받는 주체, 즉 귀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있지도 않은 귀신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라는 것이고, 둘째, “그 귀신이 흩어지는 과정에 있는 기에 불과하다고 하면, 먼 조상의 귀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있지도 않는 것에 대해 거짓으로 있는 듯이 여기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라 안정복은, “제사가 허망한 것이 아니고 분명히 어디로부터인가 와서 후손의 제사를 받는 주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 귀신은 흩어지는 기와는 다른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질문을 도출하였다.20)

  안정복이 제기한 이 논의는 실은 그가 새롭게 내세운 것이 아니고, 16세기 말부터 중국에 진출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유교 지식인들을 상대로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 나아가 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해 방법적으로 제기한 질문이었다. 성호 학파 중에서도 안정복은 기독교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스스로 기독교인들의 논설에 주목했던 이유는 유교의 귀신 개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문제제기에 일면의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와 같은 서양 선교사들이 일찍이 간파하였던 유교적 사생관의 맹점, 즉 불멸의 영원성을 희구하여 원대의 조상에게까지 제사를 지내면서도  그 제사를 흠향하는 귀신을 유한한 기로 설명하는 것은 안정복이 생각하기에도 다소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한 안정복은 기독교적인 영혼관이 과연 그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따져 보았다. 흩어지지 않는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들을 주관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그 주제자가 영혼들에게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죽어서 불멸하는 영혼으로 남게 된다면 그 많은 상과 벌을 어떻게 담당하고 처리할 것인가?  안정복은 결국 기독교적 영혼관이 유교적 사생관의 약점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교의 이론을 준수하는 입장으로 돌아간다.21)

  결과적으로 안정복은 기독교적인 영혼관을 비합리적인 교설로 단정하고 그 이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지만, 그가 이 과정에서 유교적인 귀신․사생관의 문제점을 짚어보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처럼 성호 학파 학인들에게 사이에서 영향력을 펼친 기독교 사상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의 대응을 유발하였다고 보여진다.  그 첫 번째는 안정복의 경우처럼 과학으로서의 서학에서는 배울 것이 있음을 인정하되 종교 또는 철학으로서의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명백히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와 반대로 기독교 사상을 종교로 수용하여 그것을 신앙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 것이다.22) 세 번째는 기독교 사상의 자극을 고대 유교의 본원적 입장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아 자연과 인간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자 한 노력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철학이 그 세 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5) 상제로서의 귀신 개념


  이익의 제자들로부터 서학(西學)을 접할 기회를 가졌던 정약용은 그의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종(丁若鍾, 1760~1801)과 함께 기독교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 그의 형제들이 사사․유배를 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당시의 조선사회에서는 기독교가 현실적인 가르침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통적인 유교 사상의 토대 위에서 기독교적인 신관의 장점을 수용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였다.

  정약용은 “천지는 귀신의 공용이요, 조화는 귀신이 남긴 자취이다.(天地者鬼神之功用, 造化者鬼神之留跡)”23)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이가 말한  “귀신은 천지의 공용(功用)이요 조화의 자취[跡]이다”라는 말의 주부와 술부를 전도시킨 것이다. 이 입론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이가 귀신을 ‘천지의 공용’, ‘조화의 자취’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귀신을 근원적인 실체보다는 일종의 현상으로 보려는 의사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리학의 이론에서는 본체의 차원에서 오직 이(理)와 기(氣)가 존재할 뿐 별도의 귀신이라는 존재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공용이니 자취니 하는 말은 어떤 실체가 있고 나서 그것이 움직인 모습 내지는 그 흔적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약용이 왜 정이의 말을 정면에서 반박하였는지 그 뜻이 분명해진다. 귀신을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체용론(體用論)으로 설명하지면, 성리학에서는 귀신을 실체[體]의 작용[用]이라고 하는 데 반해 정약용은 귀신이 바로 실체[體]라고 하는 것이다. 

  귀신에 대한 또 하나의 대표적인 개념 정의,  장재가 말한 “귀신은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정약용은 실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기(二氣)란 곧 음양(陰陽)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인 단순히 해가 가리워지거나 [陰] 햇빛이 비치는[陽] 물리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 스스로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짐승이나 곤충 같은 미물들의 지각 능력에도 못미치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어찌 양능을 가져 조화를 펼치며, 천하 사람들의 제사를 올리게 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였다.  24)

  그러면 정약용 자신이 바른 의미로 생각하는 귀신의 개념은 어떠한 것인가?  정약용이 주목하는 귀신은 상고 시대부터 제사의 대상이 되어 온 귀신, 그 중에서도 자연의 신인 천신(天神)으로서의 상제(上帝)이다. 고경(古經)에는 죽은 사람의 혼령인 인귀(人鬼)도 제사의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정약용은 그러한 기록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인귀로서의 귀신을 의도적으로 소홀히 하였다.25)  반면에 천신으로서의 귀신은 자신의 상제(上帝)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중용』 16장의 기록에서 귀신이 바로 상제임을 알게 하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옷차림을 깨끗이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라는 말을 세상 사람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행하는 제사로 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함께 지내는 제사, 즉 세상 사람을 모두를 대신해서 천자가 지내는 제사로 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제사의 대상은 상제(上帝)임이 분명하다고 한 것이다.26)

  정약용은 인간의 도덕성이 항구적으로 지켜지기 위해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인간들의 곁에 지켜 서서 그가 도덕을 행하는지의 여부를 감시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와 같은 감시자의 의미로 상제인 귀신을 상정한 것이다.  인간 내면의 도덕 본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것의 사회적 확충을 목표로 발전해 온 성리학 자체의 입장에서만 보면 정약용의 주장은 인간의 주체적 덕성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옛날로 돌아가려는 듯한 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이러한 주장을 편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도덕의 실현을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던 세속적인 유학자들에게 대한 실망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의 도덕성을 부지해 줄 다른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리학적 도덕 관념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던 초현실적인 존재, 즉 ‘귀신’과 같은 존재를 도덕의 감시자로 상정할 경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도덕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것27)이 그가 새로운 귀신론을 제창한 이유였다고 보여진다.


4. 유교적 귀신 개념의 의의


  조선 유학에서의 귀신은 인간과 자연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자연철학적 입장과 유한한 생멸의 과정을 넘어서 영원한 것에 합일하려는 종교적 염원이 하나로 묶여 있는 개념이었다.  인지로서 이해할 수 없는 괴력(怪力)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 운행의 모습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보면, 귀신은 지극히 이지적인 자연철학적 개념이다. 반면, 그것을 기계적․물질적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영원성을 매개하는 윈리적 순수성이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존중과 외경의 대상으로 삼으로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  그래서 귀신은 유한한 인간의 개체적 삶을 조상과 후손의 영속적인 관계로 이어줌으로써 영원성에 대한 인간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귀신이 이처럼 자연철학적 성격과 종교적 성격을 함께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립된 것은 중국 송대 성리학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송대 유학의 완성자 주희는 고대 유학의 제의설에 등장했던 귀신 개념과 북송 성리학의 자연철학적 귀신관을 함께 수용하여 복합적인 귀신 개념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성격, 즉 제의론적 성격과 자연철학적 성격은 서로에 대해 철학적 합리성과 종교적 차원의 윤리성를 더해 주는 상보적 관계에 있으면서, 한 편으로는 상대 요소의 고유한 성격을 제약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즉 자연철학적 입장에서 흩어지는 기로 설명되는 귀신 개념은 제사의 대상이 되는 귀신의 영원성을 보장해 주지 못하였고, 제사의 의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영원성을 보강한 종교적 귀신 개념은 기의 유한성을 전제로 하는 성리학설에 무리없이 부합되는 이론이 아니었다.

  남효온, 서경덕, 이황, 이이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적 귀신 개념이 함유하는 그 두 가지 성격을 융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면에서 보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그것이 조선 성리학의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경덕은 이(理)의 특성까지도 포함하는 일원적(一元的)인 기(氣) 개념에 입각하여 인간의 사후에 그 기의 형질(形質)은 흩어지지만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기의 본체는 항구히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일종의 영혼불멸설과도 같은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귀신을 유한한 기의 세계에 속하게 하였지만 거기에 영원한 이(理)를 함께 개입시킴으로써 제사의 대상이 되는 귀신의 영원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영원한 이에 뿌리박고 날마다 생겨나는 기가 있어서 정성 들여 구하는 자손의 마음에 감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들은 중국 성리학의 귀신 개념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귀신의 자연성과 종교성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한 노력의 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그 사회에서 공고하게 뿌리를 내렸던 성리학적 귀신론은 조선 후기에 기독교적인 신관 우리 사회에 소개되면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유학이라고 하는 큰 범위 안에 있기는 하지만 결코 ‘성리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정약용의 귀신 개념은 기독교적 신관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었다. 정약용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성리학에서 부여해 온 자연철학적 성격을 제거하고 고대 중국의 제천의식에서 제사의 대상이 되었던 귀신, 즉 상제를 귀신의 바른 실체로 상정하였다. 상제로서의 귀신은 마치 기독교의 인격신과도 같이 인간의 하루하루를 감시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징벌을 내릴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이쯤되면 정약용의 귀신을 조선 유학의 귀신 개념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약용의 귀신 개념은 오직 기독교의 영향으로만 탄생한 것이 아니며, 유교적 윤리 의식의 토대 위에서 그것을 더욱 강화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계적․자연적인 것보다는 종교적․윤리적인 것에 더 큰 의의를 두어 온 조선 유학의 정신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감각할 수는 없지만 영험한 능력을 지닌 존재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기 힘든 생각들이다. 더구나 우리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것이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며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사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영원성에 대한 기대는 시대가 바뀌고 인지가 발전하였다고 여전히 인간들의 의식 세계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그 때문이며, 그것은 이성적 견지에서 보아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조선 성리학의 귀신 개념은 인간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대를 근거없는 것으로 돌리기보다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철학적․종교적 자세로 이끄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보여진다. 이기론적 본체관과 결부된 성리학적 귀신 개념이든, 고대적 제의론으로 회귀하고자 한 정약용의 귀신 개념이든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고는 영적인 존재와의 교감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식이다. 겉으로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 듯이 하면서도 내면적으로 갖가지 미신적 사고의 굴레에 묶여있는 현대인들이  조선 유학의 귀신 개념을 돌아봄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윤리적 자각의 계기를 얻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1) 『論語』, 先進


2) 『中庸』, 16


3) 『周易』, 繫辭上 4


4) 『禮記』, 祭義


5) 張載,『正蒙』, 太和


6) 程頤, 『周易傳』, 乾卦 文言


7) 程頤,, 『周易傳』, 乾卦


8) 朱熹, 『朱子語類』, 권3 鬼神


9) 朱熹, 『朱子語類』, 권3 鬼神


10)  權近, 「壽昌宮災上書」, 『陽村集』 권31 上書類, 7a-13b


11) 조선시대의 사대부가에서 행해진 제사는 사계절마다 고조부모(高祖父母) 이하의 조상에게 함께 올리는 사시제(四時祭), 종손(宗孫)이 선조에게 올리는 선조 제사, 선조 중에서도 은의가 가장 두터운 아버지에게 올리는 예제(禰祭),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추념하는 기제(忌祭), 조상의 묘(墓)를 돌보고 지내는 묘제(墓祭), 그리고 명절에 지내는 약식 제례인 차례(茶禮) 등이 있었다.


12)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5a


13)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5b


14) 귀신을 기(氣) 한 가지로만 이해하면 그것은 철저히 물질적인 것으로만 인식될 것이며, 반대로 이(理)로만 간주하면 원리적․추상적 존재에 머물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귀신이 스스로 주제력을 갖는 신묘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 기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져야만 된다. 단, 귀신을 설명할 때 그 두 가지 중 어느쪽에 더 비중을 둘 것인지, 이․기가 함께 있는 것이 병존(竝存)인지 합일(合一)인지의 문제가 후대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의 주제가 되었다.


15)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9a


16) 같은 글


17) 徐敬德, 「鬼神死生論」, 『花潭集』 권2, 15b


18)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8b


19) 李珥, 「死生鬼神策」, 『栗谷集』 拾遺 권4, 23a


20) 安鼎福, 「上星湖李先生【戊寅】」, 『順菴集』, 권2 書


21) 같은 글


22) 성호의 제자 중 신서파(信西派)로 불리우는 이벽(李檗, 1754~1786),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이가환(李家煥, 1742~1801) 등이 이에 해당한다.


23)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0a-21a


24)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0a-21a


25) 정약용은, 『논어』에서 귀신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한 공자가 『예기』에서는 그 태도를 바꿔 귀신을 자세히 설명한다는 것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26) 丁若鏞, 『中庸自箴』 권1,  5b-6a, 16a; 『中庸講義』 권1,  22a 참조.


27)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1a